그때.
팔라몬은 잿더미가 됐다.
난 그저 그을음과 콧물 범벅이 된 채로, 목까지 치솟은 울음을 삼키며 얼굴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는 소년에 불과했다.
나는 나의 친구이자 우리의 수호자, 그리고 팔라몬의 구원자인 자렌이 우리 모두를, 영원토록 우리를 구해주고 지켜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바보같은 생각이었다.
자렌과 비록 소수였지만 우리 중 가장 굳센 의지를 지닌 최고의 사냥꾼들은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던 몰락자들을 쫓아 3일 전에 마을을 떠난 상태였다.
그 사람, 이방인은 그다음 날 도착했다.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의 친절과 호의로 내어준 방을 조용히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나는 자렌이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그에게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그 이방인은 차가웠고, 왠지 모를 거리감마저 느껴졌다.
난 그가 어딘가 낙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두렵진 않았다. 적어도 아직은.
아직 어렸던 나였지만 사람처럼 걸으면서도 사람이 아닌 괴물들은 잘 알았다. 그것들은 팔이 네 개 달린 외계의 존재로 매우 야만적이었다.
그 이방인은 정중하긴 했지만, 어딘가 침울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난 그를 슬픔에 잠긴, 낙담한 사람이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다만 당시의 난 그게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을 뿐.
자렌이 마을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내가 그 이방인 근처에 가지 못하게 무던히 노력했다.
소용없었지만.
형체가 내게 다가올수록 공포가 목을 죄어왔다.
그 검은 형체는 나를, 내 존재 자체를 꿰뚫어 보듯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웃음 지었다. 내 무릎은 힘없이 풀리고 말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러자 그는 돌아서서 그냥 걸어가 버렸다.
단 한 번도 뒤돌아보는 일 없이, 공포에 질린 소년을 그 비통과 슬픔이 가득한 폐허 속에 남겨둔 채로.
그날 이후로 난 계속 그 이방인의 그림자만을 쫓아왔다.
그리고 지금.
해가 높게 떠올라 내리쬐는 가운데, 우리는 마주 서 있었다.
몇 시간과도 같은 몇 초가 흘렀다.
그는 변해 보였다.
마치 텅 비어버린 것처럼. 양심이 가진 무게에 짓눌려 망가질 정도로 한 존재가 마땅히 지닐 그런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동안, 내 안에서 열이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총잡이의 무기... 그의 총인가. 그건 선물이었다."
내 엄지가 허리춤에 달린 길이 잘든 무기의 표면을 훑는 동안 난 계속 침묵했다.
"너를 위한... 내 선물이었지."
내 가슴 정중앙에 자리 잡은 열기는 더욱 커졌다.
자렌 워드가 죽은 그날부터 몇 번의 주기가 지나도록, 난 아주 오랫동안 나 자신이 겁쟁이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오로지 내 빛이 지닌 열기만이 느껴졌다.
그는 내게 다시 한번 물었다....
"할 말은 없나?"
그는 한동안 내 답을 기다렸다.
"계속 이날만을, 너를 기다려왔다."
어떻게든 대화를 해보려는 그의 시도들은 여태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에 비해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그동안 네가 체념했다고 생각했다. 포기했다고 말이야...."
내가 잃은 사람들, 고통받은 이들 전부가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그 기억은 이내 잔뜩 겁을 집어먹고, 약했던 한 겁쟁이 소년을 향해 걸어가는 검은 형체로 바뀌었다.
내 안에서 화염이 거세게 타올랐다.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여기 이렇게 내 앞에 도달했군. 드디어 끝인가...."
그의 혀가 말을 자아내는 동안 총을 쥔 내 손이 마치 의지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 움직였다.
분노와 뒤섞인 반사신경과 목적의식, 그리고... 끝을 갈망하는 넘쳐흐르는 뚜렷한 욕구가.
내 움직임과 함께 내면의 화염이 어깨로 모여들어, 세 번째 아버지의 총을 쥐고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팔을 타고 흘러내려 갔다.
두 번의 총성. 분노어린 빛에 감싸인 두 발의 총탄이 발사되었고
그는 무너져내렸다.
난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그 마구잡이로 뒤틀린 역겨운 총, 저주받은 가시를 들어 올리지도 않았다.
수많은 죽음을 불러왔던, 이제는 죽은 자를 난 내려다봤다.
총은 여전히 내 빛이 일으킨 일렁이는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갑자기 슬픔이 엄습했다.
난 내 어릴 적 기억을, 팔라몬과 자렌을 돌이켜보았다.
죽은 자의 헬멧을 향해 총구를 들어 올리며, 난 나의 멘토이자 구원자, 아버지이며 친구였던 이를 향해 마지막 헌사를 읊조렸다....
"네 것이지... 내가 아니라."
...그리고 이제는 나의 총인 자렌의 총이, 마지막 말을 크게 내뱉을 수 있도록 손가락에 힘을 주어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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